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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벨] Call me when you get this 1

* 170114 벨져른 교류회에서 배포했던 릭벨져 회지입니다



릭은 상가들이 늘어지게 자리한 거리를 걷고 있었다. 횡단보도 앞에 서 파란불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차가운 바람에 목도리를 콧잔등까지 올려 단단히 여미었다. 몸을 웅크리고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어도 추위가 가시지 않았다. 릭은 발뒤꿈치를 까딱이다 몸을 돌렸다. 커다란 상점의 쇼윈도에 비친 짙은 회색빛 롱코트가 눈길을 끌었다. 릭은 단번에 누군가를 떠올렸다. 제가 알고 있는 사람 중 가장 저 코트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릭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파란불이 깜빡거렸다. 옆에서 함께 신호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어느새 횡단보도 너머의 거리로 바쁜 걸음을 옮겼다. 릭은 허망한 웃음을 내뱉고 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깜빡이는 초록불이 위협적이었다. 손을 빼고 머리가 휘날릴 정도로 달리고 난 뒤 도로에는 다시 차들이 서로를 가로질렀다. 릭은 제멋대로 날아간 머리를 정리하고 호흡을 다듬었다. 힘껏 달린 후에 후끈한 온기가 도는 손을 쥐었다 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벨져를 처음 만났을 때가 언제였더라. 그때도 비슷한 거리를 걸었던 것 같다. , 날씨는 훨씬 포근했었고.

릭이 벨져를 알게 된지는 5개월이 조금 안되었다. 그 사이에 벌써 계절이 두 번 바뀌었다. 늦여름쯤에 봤으니까 가을, 겨울 두 번이 맞지. 릭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짧은 시간인지 긴 시간인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릭은 찬찬히 기억을 짚어보기 시작했다. 릭 톰슨이 벨져 홀든이라는 사람을 알고, 보고 겪었던 그 시간들을.

 

*

 

분명히 이쯤인데. 릭은 폰에 그려진 약도를 보며 몸을 기웃거렸다. 사실 꽃을 사갈 생각은 없었다. 아니, 이전에 이런 약속을 잡게 된 것도 릭의 생각이 아니었지만. 제 어머니, 톰슨 부인은 릭이 절대 이겨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얼마 전, 릭은 본가를 찾았다. 오랜만에 보는 가족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맛있는 음식으로 가득한 식탁을 비우고 나서 후식으로 딸기타르트를 쪼개먹고 있을 때였다. 처음엔 흘러가는 얘기처럼 가구점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심성 고운 아가씨 얘기를 조곤조곤 늘어놓던 톰슨 부인은 그에 맞춰 적당한 반응을 내놓는 릭에 뜬금없는 결론을 내놓았다. 그래서, 좀 만나봐. ? 어머니 말씀을 반쯤은 흘리면서 필링으로 채운 크림치즈맛이 독특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들은 말이었다. 다행히도 릭은 포크를 들고 있는 손의 힘이 빠져 포크를 떨어트리거나 입안에 막 넣었던 타르트 조각을 뱉거나하는 얼빠진 짓은 하지 않았다. 다만 그게 무슨 말씀이냐며 나름대로 반박하려 숨을 들이쉬다 사레에 들린 것뿐이었다. 콜록거리며 어깨를 들썩이는 릭에 톰슨 부인은 한 마디 더 얹으시며 유유히 냅킨으로 입주변을 닦았다. 좋아할 줄 알았어. 릭은 억울함에 가슴만 칠뿐이었다. 좋아하다니 반박하려다 이 지경이 됐는데. 기침이 사그라들 쯤 급하게 말을 꺼내려다 다시 도지는 기침에 거의 눈물까지 맺히며 콜록대는 릭을 뒤로 하고 어머니께선 약속을 잡아놓으시겠다며 호호 웃고는 가버리셨다. 그 후로도 한참을 식탁을 붙잡고 콜록댔었지. 릭은 그때를 떠올리고는 한숨을 뱉었다.

연애를 하지 않은지가 벌써 4년이었다. 작정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기회가 닿을 때마다 바쁜 일이 생기는 탓에 인연이 아닌가보다 하고 넘겼던 게 거뜬히 한 손을 넘어가고 있었다. 딱히 외로운 것도 누군가 곁에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라서 별 것 아니라고 넘겼던 문제가 부모님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어느새 릭은 서른셋이었고 어머니께서도 아무 말 않고 지켜보기만 할 때는 지났다고 생각하셨겠지. 이런 것에 대해서 걱정 끼쳐드리고 싶지는 않았는데 결국 직접 수를 쓰시는 지경까지 와버렸으니 릭은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이건 좀 치사했다. 강경하게 말하는 것보다 장난처럼 말하는 것에 약하다는 걸 이렇게 이용하실 줄이야.

릭은 화면 위에 적힌 시간을 확인했다. 1022. 만나는 시간까지 아직 1시간 쯤 남아있었다. 릭은 며칠 전 문자로 약속장소와 시간을 보내면서 잘하고 오라는 말로 묘한 압박을 주던 문자를 기억했다. 문자 끝에 달린 신사처럼 행동하라는 말이 내내 생각나 결국 꽃집을 찾은 것이었다. 덕분에 피곤한 눈을 부비며 적당한 꽃들을 찾아보다 여기저기 다른 말들에 지쳐 머리를 감싸고 고민하다 집에서 가까운 꽃집만 찾고 곯아떨어졌다. 애매한 위치에 이리저리 잘 찾아오긴 했는데 도저히 꽃집이라고 쓰인 곳이 없다. 집근처라고는 해도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눈에 익은 것이 없어 더 힘이 들었다. 위치는 여기가 맞는데 릭 앞에 있는 가게에는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간판이랄 것도 없고 그저 새하얗게 칠해진 외관과 불투명한 유리창이 다였다. 도저히 꽃집 같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꽃집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카페에 더 가까웠다. 문을 연 것 같지도 않고 그냥 다른 곳을 찾아볼까하다,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대체 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시간도 넉넉하겠다, 릭은 들고 있던 폰을 주머니에 넣고 가게로 가까이 갔다. 안이 잘 보이지 않아 유리창에 눈을 갖다 대었다, 가게 내부보다 제 모습이 더 잘 보이는 것에 숙였던 허리를 폈다. 불이 켜진 것 같기도 하고 꺼진 것 같기도 하고. 내부의 형태도 희미하게 보이는 것에 릭은 가게에 가까워져있던 몸을 두 발짝 물렸다. 떨어지자 더욱 선명하게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최대한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너무 가볍지도 않은 옷으로 고민해서 입은 옷인데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이래서 하기 싫었는데. 앞머리를 매만지며 속으로 줄지어 한탄을 하던 릭은 제 모습이 왼쪽으로 기우는 것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엇인지 인지할 새도 없이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손님?"

갑자기 가게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에 릭은 머리를 만지던 손을 멈췄다. 곧게 뻗은 목소리에 이어 나온 사람은 앞치마 차림이었다. 대체 가게 밖에서 뭘 하느냐고 타박을 주는 말에도 릭은 자세를 바꾸지 그대로 못하고 서있었다.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아 말문이 막히는 것에 릭은 일단 제일 고민하던 것을 물었다.

"여기가 꽃집 맞소?"

별 것 아닌 질문에 릭은 어쩐지 긴장이 되었다. 저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릭은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 간판이 없어서 몰랐어."

질문을 마치자기가 무섭게 돌아오는 대답에 릭은 당황했다. 너무도 당당한 남자의 말에 다시 할 말이 없어진 건 릭이었다. 간판도 없고 꽃집이라는 것을 나타낼만한 어떤 것도 없는데 단번에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 게 이상했다. 그런데도 왜 그런 걸 묻냐는 듯한 말투에 릭은 제가 잘 알아보지 않고 괜한 것을 물었나하는 생각이 잠깐 들 정도였다. 당황해 급하게 뱉은 말조차 왠지 모르게 작아지는 느낌이라 릭은 목을 가다듬으며 괜히 머리만 만지작거렸다. 그러는 릭을 말없이 쳐다보던 남자는 문을 고정시키고 등을 돌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릭은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다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남자를 따라 움직였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코를 감싸는 꽃내음과 눈앞에 펼쳐지는 꽃밭에 릭은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떤 꽃을 찾고 있지? 외관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릭은 대체 왜 간판을 걸지 않았는지 묻고 싶었지만 어쩐지 그럴 수가 없었다. 첫데이트 때 줄 꽃 좀 추천해주겠소? 릭은 입 안 가득 차있는 말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이 남자는 어쩐지 사람을 긴장시키는 재주가 있다고 릭은 생각했다.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이 불편했다.

 

*

 

집에 오자마자 릭을 반기는 것은 어머니의 전화였다. 막 집에 들어온 건 또 어떻게 아시고 이렇게 귀신같이 전화를 하시는지. 받자마자 쏟아지는 말에 릭은 잠시 전화기를 뗐다 소리를 낮추고 다시 귀에 갖다 대었다. 잘했냐는 말부터 시작해 어땠느냐고 물으며 답을 말할 틈은 주지도 않고 몰아쳤다. 정작 데이트를 하고 온 당사자보다 더 들떠있는 것에 잔잔히 웃을 뿐이었다. 왜 말이 없냐며 빨리 말해보라고 저를 닦달하는 어머니에 릭은 그제야 목소리를 냈다. 그냥 그럭저럭 괜찮았다는 말에 자세히 좀 말해보라고 하시는 목소리가 너무 들떠보여서 눈썹을 늘어뜨려 웃음 짓고는 찬찬히 처음부터 말하기 시작했다. 적당한 크기의 꽃다발을 사갔고 약속시간보다 10분 먼저 도착했으며 대화가 끊기지 않았고 집까지 잘 데려다 주었다는 이야기들. 그 중에 제일 마음에 들어하셨던 것은 꽃 얘기였다. 더 재촉하지 않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얘기를 듣고 계셨을 어머니는 피곤할 텐데 얼른 씻고 쉬라며 더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끝에 두 번째 데이트 신청은 언제 할 것이냐는 은근한 압박도 빼놓지 않고 알겠다는 릭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전화를 끊으시는 것이다.

전화가 끊기고 빠르게 방을 채우는 고요에 릭은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아직 옷은 벗지도 않은 채 푹신한 이불에 얼굴을 부비고 한숨을 쉬었다. 피곤해. 역시 이런 자리는 불편했다. 같은 목적을 가진, 거기다 처음 보는 상대방과 끊임없이 대화거리를 찾고 얘기하며 그 속에서 호감을 주고 받아야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물론 어머니께는 말씀드릴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상대는 나쁘지 않았다. 만나는 동안의 분위기도. 엄밀히 말하자면 썩 괜찮았다. 만나자마자 왜 어머니가 만남을 주선하려고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은근히 까다로운 구석이 다분한 어머니께서 그렇게 칭찬을 하시며 만나보라고 한 상대라면 그저 괜찮다는 말보다는 더 나은 말이 적당했다. 확실히 그랬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면서도 괜찮다는 무미건조한 말로 첫인상을 채운 것은, 무언가 확실히 제게 다가오는 느낌이 없어서일까. 남들이 들으면 분명 배가 불렀다 할 테고 어머니께서 알게 된다면 고운 말은 못 들을 테지만 애초에 릭은 연애가 고프지도 않았고 딱히 원하던 만남도 아니었으므로 이렇게 느끼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릭은 세상을 살아간 지 30년이 넘은, 웬만큼은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아는 남자였으나 그는 운명을 믿었다. 이런 말을 뱉으면 열에 아홉은 아직 뭘 모른다는 식으로 웃었던 탓에 언제부턴가 입 밖으로 잘 꺼내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가지고 있는 생각이었다. 주변에 숱하게 만나고 헤어지는 연인들을 보면서도 릭의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자신의 목숨과 맞바꿔도 아깝지 않을 만큼 사랑하게 될 연인이 분명히 존재하며 그 사람을 보는 순간에 바로 알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릭은 그 느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여태 릭이 연애에 별 관심을 갖지 않는 이유였고 그동안 가졌던 만남의 끝에서 남들보다 빨리 헤어 나올 수 있었던 이유였다. 릭은 운명을 믿었다. 그리고 그 운명은 아직 제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을 조금 바꾸어 말하자면, 릭은 지난 어떤 연애에서도 모든 진심을 다한 적이 없었다. 오늘의 만남 또한 그랬지만 어머니가 원하시니 몇 번 더 만나볼 생각은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계속해서 만난다고 해도 깊은 마음 없이 그냥 서로 즐기기 위해 만나는 사이가 다일 테지.

릭은 아까 왔던 메시지를 확인했다. 저장된 이름을 보며 아까 너스레 떨었던 것이 떠올랐다. 베티 모나한, 참 예쁜 이름이오. 내뱉으면서도 상투적이라는 생각을 했었지. 집에는 잘 들어갔냐는 문자였다. 적당히 답을 하고 폰을 덮었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가 몸을 짓눌렀다. 릭은 숨을 한 번 내쉬고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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