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릭벨] 놀이공원 2
“벨져, 잠깐만 나 화장실 좀…….”
허락을 구하는 말이 아니었던 듯 릭은 그 말을 남기고 급하게 화장실로 뛰어갔다.
차를 모는 내내 신이 나서 흥얼거리는 릭은 벨져가 정신을 빼놓을 정도로 입을 쉬지 않고 말했다. 조수석에서 운전하는 사람을 내버려두고 자는 것이 예의가 아님을 벨져는 잘 알고 있었으나 없는 멀미가 생길 정도로 시끄러운 릭에 벨져는 의자를 조금 내리고는 잠을 청했다. 눈을 감은 벨져를 흘끗 확인하고는 그제야 입을 다문 릭이 만족스러워 미소를 짓고 이제 잠에 들려할 때 도착했다며 저를 조심스레 흔드는 릭의 손길이 그렇게 짜증이 날 수가 없었다.
발에 불이 난 듯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릭의 손에 끌려 다니다시피 입장권을 손목에 매고 TV에서 보았던 롤러코스터 줄에 섰다. 눈치 주는 것에 아랑곳 않고 휴가를 얻어 사람들이 붐비지 않는 평일에 놀이공원을 찾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앞의 사람들이 기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롤러코스터에 앉아 안전장치를 확인했다.
무서우면 내 손을 꼭 잡으시오. 묘하게 자신만만해하는 얼굴이 맘에 들지 않아 콧방귀를 꼈다. 떨어지기 위해 달려가는 길에는 느릿한 소리가 가득이었다. 벨져, 괜찮아. 벨져는 토닥이는 손을 쳐냈다. 저를 무슨 취급하는지 정확치는 않아도 릭의 태도에 벨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추락하기 일보 직전까지 다다른 롤러코스터는 힘겨운 소리를 내는 것도 잠시, 빠르게 속도를 냈다. 원을 그리고 다시 떨어지고를 몇 번 반복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천히 출발했던 그곳으로 돌아왔다.
벨져는 이리저리 휘날려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다듬었다. 가자. 저의 말에도 멍하니 대꾸도 않는 릭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 어. 어색하게 말을 더듬는 릭은 어쩐지 얼이 빠진 모습이었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자연스레 표정 지으려하는 것이 우스웠다.
'벨져, 어땠소? 무섭지 않았어?'
'내가 무서워해야 하나?‘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대가 즐긴 것 같아 다행이오.'
'재미는 모르겠고 바람은 시원하더군.'
무덤덤하게 내뱉은 말에 떨떠름한 얼굴이 된 릭을 이번엔 벨져가 이끌었다. 길쭉한 막대 밑에 달린 원형통 테두리에 사람들이 앉아있고 좌우로 휘둘리며 통은 동그랗게 돌고 있는 놀이기구앞에 섰다. 360도까지 도는 기구에 무서울 것이라며 벨져의 팔을 붙잡고 말렸지만 벨져는 꿈쩍도 않았다. 무서워하는 것은 저인 주제에 이 상황에서도 벨져 핑계를 대는 릭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막아두었던 놀이기구 문이 열리고 안으로 발을 옮겨야 하자 릭이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걸음을 돌렸다. 몸을 돌려 잽싸게 릭의 옷깃을 움켜잡은 벨져는 놀이기구를 향해 릭을 끌었다. 발을 끌며 조금이라도 시간을 늦춰보려는 노력에 눈물이 다 겨웠다. 벨져는 릭을 당겨 귀를 가깝게 하고 속삭였다.
'무서운 가?'
웃음을 띠고 있는 도발에 릭은 방향을 반대로 바꿔 성큼성큼 걸어가 제 발로 기구에 앉았다. 아직까지 혈색이 돌아오지 않은 얼굴에 비장한 릭의 표정은 벨져에게는 충분한 유희거리였다. 몸 밖으로 나오는 반응은 ‘무서워 죽겠다’인데 자존심에 말은 못하고 벨져의 도발에 넘어가 제 눈을 찌르고 있었다. 이따금씩 흘러가는 소리로 벨져에게 자존심 좀 꺾으면 어떻냐고 훈계 비슷한 것을 하는 릭이었지만 남에게 뭐라 할 수 있는 처지는 안 되었다.
처음엔 서서히 움직이던 기구가 속도를 더하기 시작하자 릭은 눈을 세게 감았다. 어깨를 누른 안전바를 쥔 손가락이 벌써 새하얬다. 점점 강도가 세지는 것에 릭은 인상을 더 찌푸렸다. 벨져는 바람에 흔들리는 제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릭의 겁 질린 모습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릭을 구경하려 돌린 고개가 불편해 맞은편에 앉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소파에서 무엇을 생각하며 그리 즐거워했던 것인지 벨져는 그 마음 전체를 이해할 수 있었다.
기구 자체에는 딱히 재미를 느끼지 못했으나 TV 안의 사람들 그 이상으로 넋이 나가는 장면을 보여주는 릭에 벨져는 정말 오기 잘했다고 생각했다. 유난히 오늘따라 피부가 좀 하얗군. 웃음을 감추지 않고 말하는 벨져에 릭은 오늘따라 쌀쌀하지 않냐 반문했다. 장난기 가득한 물음에도 릭은 그것을 깨달을 겨를이 없었다. 30도 가까이 올라가는 날씨에 쌀쌀이라. 벨져는 굳이 그 말을 꺼내 릭을 몰아세우지 않았다. 다만 무서워할만한 기구들로 이끌어 릭이 자존심을 꺾고 제 입으로 실토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자신만만하게 오자고 한 주제에 이런 상황은 생각도 못한 모양이지. 저를 가지고 그런 식으로 즐기려고 한 것에 대한 복수였다.
이런 과정을 몇 번 반복하고 난 후가 지금이었다. 화장실 근처의 카페에 들려 주문한 에이드가 거의 반이 되고나서야 이쪽으로 걸어오는 릭의 모습이 보였다. 마지막에 탔던 것엔 벨져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무서움에 몸을 숙이더니 결국 먹었던 것을 모두 게워낸 모양이었다. 편해 보이지 않는 얼굴과 빨갛게 물기 어린 눈이 저를 보며 머쓱하게 한 번 웃었다.
“말을 하지 그랬나. 등이라도 두드려 줬을 텐데.”
“아니, 그대에게 그런 꼴 보여주고 싶지 않아.”
눈썹을 늘어트린 릭이 팔을 휘저으며 힘없이 말했다. 너도 참 어지간하군. 제 고집을 향하는 말에 릭은 한 번 더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