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릭벨] IOU 5

빌닻 2016. 9. 26. 18:46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늘었으면 늘었지 절대 줄어들 돈이 아닌데 올라오는 보고서에 적힌 숫자들이 조금씩 내려가는 것을 보고 벨져는 마약을 총괄 담당하는 조직원을 불러 어떻게 된 일인지 원인을 찾고 다시 제게 보고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 다음 날, 벨져는 릭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몇 주 전부터 다른 나라에서 약을 공급받아 싼 가격에 팔아넘기는 미국 샌님. 벨져는 릭의 사진을 응시하다 신상들이 적혀있는 칸으로 눈을 돌렸다. 28살 회사원, 소속된 조직 없음……. 릭이 약을 건네며 웃고 있는 사진들을 넘겨보던 벨져는 해결하고 다시 보고하겠다는 조직원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아니, 내 앞에 데려와. 재밌을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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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은 챙겨 나온 자켓을 여미었다. 하늘이 어두워 하마터면 늦게 일어날 뻔 했는데 공기까지 차가웠다. 볼에 스치는 바람에도 물기가 어려 릭은 비가 오겠구나 생각했다. 허겁지겁 준비한 탓에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커피향이 코를 찌르는 카페 앞을 지나치고 회사로 향하는 골목을 걷는 릭은 뒤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가 거슬렸다. 아까부터 뒤에서 들리는 소리였는데 여지껏 들린다는 건. 릭은 고개를 저었다. 영화를 너무 많이 봤어. 스스로 머쓱해져 웃음 짓는 릭의 머릿속에 브랜든의 말이 스쳤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다는 말이. 몸에 한기가 들어 어깨를 떨고 천천히 고개를 돌아보던 그 순간에 릭은 머리에 무언가 세게 부딪히는 느낌과 함께 시야가 까맣게 흐려지는 때에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막 살 걸.

 

릭은 맥박을 타고 퍼지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는 표현을 실감했다. 뒤통수에 손을 가져다대려 했으나 제 말을 듣지 않는 팔에 눈을 떴다. 어둡던 시야에 갑자기 들어오는 빛에 눈이 시렸다. 몸에 감각들이 서서히 돌아왔다. 일단 아픈 곳은 머리뿐이었다. 붙잡혀있는 팔이 갑갑하긴 했지만 제 팔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 더 무서워 릭은 아무 말도 않았다. 무어라 말소리가 들렸으나 릭은 제 생각에 갇혀 제대로 듣지 못했다. 이제 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대로 죽는 건 아니겠지. 시린 눈을 끔뻑거리며 바닥에 깔린 카펫만 바라보던 릭은 옆에서 툭툭치는 감각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눈을 살짝 찡그렸다 또렷하게 바라본 곳에는 어떤 남자가 있었다. 어깨 너머로 길게 내린 하얀 머리가 부서질 것 같이 빛나고 창백하리만치 흰 피부는 꼭 처음 내린 눈 같았다. 저를 내려다보는 눈이나 길게 뻗어 적당한 곳에서 떨어지는 코가 꼭 누가 조각해놓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다물린 입 끝이 살짝 올라가있는 게 릭에게는 강하고 온화한 어떤 것처럼 느껴졌다. 릭은 어렸을 때 보았던 동화책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저건 마치,

 

천사…….”

 

어느새 벌어진 입술 사이로 숨소리처럼 흘러나왔다. 릭은 저도 모르게 내뱉은 단어에 당황할 만큼의 자각조차 없이 스스로 납득하기 시작했다. 천사가 있다면 필시 저런 모습일 것이라 감탄했다. 릭은 그 어떤 잡지나 티비에서도 저렇게 생긴 어떤 것들을 본 적이 없었다. 아름답다는 표현만으로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아름답고 우아하고,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남자가 살짝 움직인 자리를 채우는 빛에 릭은 눈을 가늘게 떴다. 느리게 움직이던 눈이 둥글게 휘어지는 것을 보다 바보 같은 소리를 낼 뻔 했지만 남자가 내는 소리에 놀라 들어가 버렸다. 남자는 짧게 바람이 빠지는 소리를 내다 이윽고 고개를 젖히며 큰 소리로 웃었다. 손가락으로 눈꼬리를 훑던 남자는 아직 웃음기가 가시지 않았는지 입은 여전히 올라가 있었다. 남자는 손을 들어 허공에 두 번 내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릭은 붙들려 있던 팔을 갑자기 돌려받고 그 반동에 앞으로 고꾸라질 뻔 했으나 겨우 바닥을 짚어 더 이상은 흉한 꼴은 피하게 되었다. 정갈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 둘이 방을 나가고 문이 닫히는 소리 후에 급격한 침묵이 찾아왔다.

 

릭은 생각보다 뻐근한 어깨에 목을 틀다, 잊고 잊던 통증에 급하게 제 머리를 만졌다. 손가락 끝이 닿은 곳이 축축해 릭은 덜컥 겁이 났지만 스스로를 안정시켰다. 심호흡을 하고 아닐 것이라고 몇 번 속으로 되뇌인 후에 눈을 감았다 조금씩 눈꺼풀을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약간 검은 색을 내비치는 피가 손가락을 적시고 그것을 확인한 릭이 손을 잘게 떨었다. 릭에게는 지금도 욱신거리는 통증보다 제 눈으로 확인한 피가 더 충격적이었다.

 

벨져는 릭을 바라보았다. 피가 묻은 손을 떨며 혼자 중얼거리다 몇 번이고 뒤통수에 손을 넣어 확인하는 모습이 여간 멍청해 보이는 게 아니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벨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 채로 납치된 주제에 태평스러운 모습하며, 저를 납치한 사람을 보며 한다는 첫 마디가 가관이었다. 제 예감이 맞았다. 벨져는 간만에 아주 재미있는 것을 건졌다고 생각했다. 이젠 제가 하던 행동을 멈추고 벨져를 쳐다보는 릭에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릭에게 갈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