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릭벨] 별이 빛나는 밤에
* 벨져른 교류회 기념책자로 제출한 것 :)
릭은 벨져를 가만히 쳐다보는 것이 좋았다. 물론 그럴 때마다 벨져에게 들켜 정신 빼놓고 있지 말라는 핀잔을 들어야했지만 그 핀잔쯤이야 가볍게 넘길 수 있을 정도로. 가끔씩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때에도 시선이 벨져로 향해 있는 것에 릭은 조금 심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괘념치 않기로 했다. 사랑하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으리라. 하루에도 몇 번이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말이었다.
자신의 능력은 꽤 쓸모가 많았다. 벨져를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능력 덕분이었다. 발현된 순간부터 숱하게 했던 생각이었지만 요즘처럼 감사한 때가 없었다. 모두가, 특히 벨져가 탐을 내는 능력을 가진 것이 다행이었다. 벨져는 전장 어디를 가든 릭을 데리고 다녔다. 그것을 본 이들은 가엾다는 눈빛으로 릭을 보았다. 간혹 너무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냐며 직접 입을 대는 이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릭은 어깨를 올리며 웃을 뿐이었다.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듯이. 그러면 모두 입을 모아 사람이 너무 착해도 탈이라고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었다. 그들은 릭이 그 나름대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절대 모를 것이었다. 게다가 그 목적이라는 것이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 넘는, 조금은 불순한 형태라는 것 또한.
릭은 오늘도 벨져와 함께였다. 가는 모래들이 땅바닥 가까이에 파도처럼 넘실대고 생기라고는 보이지 않는 주변에 릭은 눈을 깜박였다. 마침 구름 사이로 들어온 빛이 벨져를 비추었다. 은색 머리칼에 맞닿은 햇살이 부서져 갑주에 순서대로 닿으며 반짝였다.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죽어있는 곳에서 오롯하게 벨져만이 살아있는 듯 했다. 이 세상에 빛나는 것은 저 외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허리춤에 찬 두 검을 언제든 꺼낼 수 있도록 그 언저리를 떠나지 않는 손이 익숙했다. 모두의 앞에 서 전장을 지휘하고 고민하는 뒷모습을 보며 릭은 벨져의 표정을 그렸다. 언젠가 벨져의 옆에 서서 그를 지켜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옅게 부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사락거리는 것이나 생각을 하느라 조용히 내리깐 눈, 눈썹이 산을 그리고 눈을 찡그렸다 이내 선명하게 뜨는 순간이 생각의 끝이었다. 그리고는 눈을 한 번 감았다 숨을 들이쉬며 뒤를 돌고 자신이 생각했던 작전들을 차분하게 읊기 시작했다.
“릭, 듣고 있나?”
제 이름이 들리는 것에 릭은 얼른 고개를 들었다. 언제 생각을 끝낸 것인지 벨져는 어느새 뒤를 돌아 저를 보고 있었다. 어, 듣고 있소. 탐탁지 않은 눈으로 저를 보는 것에 릭은 급하게 말을 뱉었다. 어색하게 웃음 짓는 릭을 보고 벨져는 무어라 말을 꺼내려 입을 열었다, 곧 한숨을 쉬고는 아까 하던 말을 이었다.
벨져의 말에 집중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곡선을 그리는 목소리나 찰방거리는 속눈썹, 그리고 저를 쳐다보는 또렷한 눈동자들이 떠다닐 때는 아까까지만 해도 축복처럼 느껴지던 것이 금방 한탄으로 바뀌었다. 다시 마주친 벨져의 눈초리가 얇게 변하는 것에 릭은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눈을 똑바로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 너머로 아른하게 들리던 단어들을 말하자 그제야 벨져의 눈길이 릭을 떠났다. 어서 게이트를 연결하도록. 다시 등을 돌리는 벨져 모르게 긴장으로 참았던 숨을 내쉬고 손을 휘저었다. 지금부터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게이트 너머로 벌써 피비린내가 언뜻거리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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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가 게이트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본 후에야 릭도 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침대에 걸쳐놓고 옷을 벗었다. 움직일 때마다 풍기는 비릿한 냄새가 콧속을 가득 채우는 것에 릭은 잔기침을 했다. 옷장에서 꺼낸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야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저를 감싸는 푹신한 감각에 릭은 절로 얕은 탄성을 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대로 침대가 저를 삼키고 저 깊은 곳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번쩍 뜬 눈은 어지러운 시야를 바로잡았다. 하얀 페인트로 덮인 천장은 움직임 없이 그대로 제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릭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천장을 지켜보다 문득 떠오른 죄책감의 부재에 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리고 동시에 릭이 처음 전장에 나가 저의 능력으로 누군가를 죽였을 때, 벨져가 한 말이 떠올랐다. 너도 이러한 것들로 평화로울 수 있었고 이제 그 평화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 이어줄 뿐이다. 뒤에 붙었던, 쓸데없이 쳐져있을 시간 따위 없다던 말들은 릭이 좋을 대로 잘라버렸지만. 비록 말투는 결코 부드럽지도, 위로하기 위해 한 말이라고도 절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으나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더욱 마음으로 와 닿는 것인지도 몰랐다. 너는 사람 한 명을 죽인 것이 아니라 그가 희생시킬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그들의 인생을 구한 것이라고, 듣기 좋게는 절대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실의에 빠져 있는 릭을 위해 저 나름대로 무언가 말하려고 머리를 굴렸을 벨져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서 도저히 입꼬리가 내려가지 않는 것이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전과는 조금 다른 미묘한 감정이 일렁이기 시작한 것이. 릭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눈을 감았다. 무거운 피곤에 자꾸만 눈이 감겼다.
릭은 길을 걷고 있었다. 뻗은 발 앞으로 차이는 돌이 저만치 굴러 멈추는 곳에 벨져가 서 있었다. 평소와 변함없이 갑주를 갖춰 입은 모습이 반가워 조금씩 뛰기 시작했다. 천천히 거리가 가까워지고 품위 없이 뛰지 말라며 미소 짓는 벨져에 릭은 덩달아 웃었다.
어서 게이트를 연결해. 벨져의 말에 작은 움직임으로 자연스럽게 전장을 비추는 게이트를 연 릭을 보며 벨져는 고개를 젓고 말했다.
“수많은 별이 펼쳐진 밤바다를 보여준다 하지 않았나.”
내가? 검지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되물으니 벨져는 고개를 끄덕인다. 릭은 그제야 전에 자신이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꼭 보여주고 싶은 곳이라며 같이 가자고 말했었지. 이제 생각났다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릭에 벨져는 미련하다며 웃었다. 그에 릭은 너무 하다고 울상 짓는 것도 잠시 이내 게이트를 열었다. 벨져에게 약속한 장소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게이트에 발을 들이며 걸음을 재촉하는 벨져에 릭은 눈을 크게 떴다. 제 앞에 저를 향한 벨져의 손이 있었다. 굼뜬 것을 보니 가기 싫은 모양이군. 제안은 네가 먼저 했던 것으로 아는데. 미간을 살짝 구기며 말하는 벨져를 흘끗 보고 릭은 얼른 그 손을 잡았다. 그 순간, 무언가 뒤틀리는 느낌에 릭은 뒤를 돌았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감각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벨져의 손에 이끌려 바다에 도착했다.
파도가 밀려와 철썩대며 부서지는 소리가 귀를 덮었다. 사람이 손댄 불빛 없이 달이 내린 노란 빛이 번쩍거리며 물결 위로 흩뿌려지는 것에 릭은 입술 틈으로 탄성을 흘렸다. 하늘은 까만 벨벳 위로 작은 보석들을 흐트려 강을 만든 것 같은 모양새였다. 몇 번을 봐도 그때마다 새롭게 감탄하는 풍경이었다. 릭은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벨져를 바라보았다. 영롱하게 푸른 눈 속에 담긴 바다에 릭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났을까. 하염없이 바라본 검은 바다에 빠져들 것 같은 때에 다시 묘한 느낌이 들었다. 중요한 것이 빠진 것 같은. 이상할 것이 없는데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마음에 걸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떨쳐낼 수가 없었다. 골똘히 생각하던 릭은 문득 벨져의 옷차림을 스쳤다. 단순히 바다를 보러오는 것에 저런 차림을. 그리고 제가 잡고 있는 손을 확인했다. 아……. 릭은 저의 아둔함에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자연스러웠어도 그렇지.
“벨져.”
제 이름이 들리는 것에 벨져가 고개를 돌렸다. 어디에서나 사무치게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릭은 벨져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그의 얼굴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갑작스러운 릭의 행동에도 벨져는 찡그리는 기색 하나 없이 릭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대 웃는 얼굴을 많이 볼 수 있어서 좋았소.”
여전히 벨져는 어떤 말도 없이 조용히 릭이 말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름다운 풍경을 함께 볼 수 있어서 좋았고 그리고,”
릭은 몸을 당겼다. 서로의 코끝이 살짝 스치는 거리였다. 릭은 입술을 열었다 굳게 다물고 다시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괴로움에 앓는 소리를 내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릭의 두 볼이 발갛게 물들어있었다.
“…이 말은 언젠가, 진짜 그대에게 할 것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혼자 괴로워하던 릭은 아직 부끄럼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천천히 벨져에 입 맞추었다. 부드러운 입술을 지나 따뜻한 입 속까지, 꿈이면서도 촉감까지 흉내내는 것에 릭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벨져의 뒷목에 얹은 손등으로 느껴지는 머리카락마저 따스한 느낌이었다. 아직 멀고 먼, 어쩌면 받지 못할 선물을 미리 꺼내본 느낌이었다. 행복한 꿈이었다. 정말 지독히도 행복한 꿈을 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