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벨져에 릭은 손을 멈추고 홀린 사람처럼 넋을 빼고 그를 바라보았다. 걸어오는 발소리가 느리게 느껴지고 마침내 릭의 앞에 선 벨져는 쪼그려 앉아있는 릭과 눈높이를 같이 했다. 벨져가 손을 들어 올리다 릭의 얼굴에서 멈춰 섰다. 손가락등으로 제 얼굴을 아래서부터 스치는 감각에 릭은 눈을 얇게 했다. 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만큼 모든 것이 천천히, 민감하게 느껴졌다. 릭은 저도 모르게 손을 꽉 그러쥐었다. 난 그다지 착한 사람이 아냐. 릭은 잔잔한 웃음을 띠고 있는 눈을 바라보다, 벨져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그것마저 아름다운 탓에 릭은 그 속에 담긴 내용을 조금 후에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손해를 봤어. 고객을 잃었고 신용을 다시 얻는데에 또 막대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 이게 누구 때문일까?”
벨져는 여전히 릭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아까와는 다른 분위기에 릭은 소름이 올랐다. 쓰다듬는 손이 차가운 느낌이었다. 벨져의 손길에 릭의 몸이 움찔거렸다. 팔을 올려 제게 닿는 손을 멈추게 하고 싶었으나 분위기에 눌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주보는 눈에 모든 것이 옭아드는 느낌이었다. 위험한 사람이다. 풍기는 공기가 살벌했다.
“잘못했소. 나는 그냥 실수로…….”
“성인이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지.”
릭의 굳은 얼굴을 만지던 손이 거둬졌다. 벨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릭의 우위를 차지했다. 릭은 자존심을 내세우거나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전략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릭의 모든 감각은 생존에 집중했다. 살아가면서 이와 같은 인간을 본 적이 있었나. 벨져의 눈빛은 포식자의 그것이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그 위에서 군림하는.
느리게 걷는 걸음으로 벨져는 원래 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앉았다. 릭은 벨져에게서 한 순간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하얀 맹수가 언제 저를 덮칠지 몰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벨져는 긴장하고 있는 릭을 눈치 채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에도 움찔대는 릭에 벨져는 가엾고 딱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선택지를 주지. 눈? 신장? 어디가 좋아?”
간도 나쁘지 않지. 변화 없이 평이한 말투에 릭은 제가 방금 무엇을 들은 것인지 귀를 의심했다. 지금 벨져는 어떤 장기를 팔 것인지 릭에게 묻고 있는 것이었다. 릭은 브랜든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다는 게 이런 의미였구나. 짧은 후회를 거쳐 릭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꿈이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이게 현실이면 안 되잖아.
“살려주시오. 아직 죽고 싶지 않아. 아직 28살 밖에 안됐고……,”
“난 지금 널 죽이겠다고 말하는 게 아니야. 오해는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그러니까 그 두 개가 무엇이 다르냐고 릭은 묻고 싶었으나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한 벨져의 얼굴에 입을 다물었다. 벨져는 릭을 보채지 않았다. 그저 입을 열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릴 뿐이었다. 릭에게 그것 또한 부담이었으나 벨져에게는 명백한 아량이었다. 다른 선택지는 없소? 릭은 마침내 현실을 받아들였고 이제 그것과 타협을 보고 싶었다. 더 이상 물러날 수 있는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28년 인생을 모두 끌어올려 최대한 불쌍한 눈으로 벨져를 바라보고 말했다. 제 시선에 벨져의 눈이 측은한 빛을 띠자 릭은 조금 안심했다.
“선택이 힘든 모양이니 내가 도와주지.”
들어와. 벨져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리며 아까 릭의 팔을 잡고 있었던 남자가 다시 들어왔다. 릭은 빠르게 제게 걸어오는 남자들을 확인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벨져를 쳐다보는 순간 시각이 흐려지고 침몰했다. 아까와 같은 통증이었다. 아른해지는 눈이 감기는 순간까지도 릭은 벨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릭은 아까 저가 했던 판단이 완벽하게 틀렸음을 인정했다. 천사의 탈을 쓴 악마. 벨져에 대해 다시 내린 정의였다.
-
릭은 다급하게 숨을 삼키며 악몽에서 벗어나고자 몸을 일으켰다. 급하게 일으킨 몸에서 물이 튀었다. 물? 릭은 그제야 제가 있는 곳을 확인했다. 하얀 욕조 속에 구겨져있는 다리가 뻐근했다. 무엇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 온통 얼음으로 뒤덮여있었다. 저의 모습을 인지하고 나서야 감각들이 돌아왔다. 추위에 턱이 떨려 손으로 어깨를 감싸고 몸을 웅크렸다. 서서히 얼얼해지는 느낌에도 한기는 가시지 않았다.
“몸은 좀 어때?”
아까의 정장에서 재킷을 빼고 셔츠 위에 어떤 것도 걸쳐 입지 않은 벨져가 왼쪽 소매를 걷어 올리며 릭 쪽으로 다가왔다. 벨져의 말을 듣고 나서야 릭은 아까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눈? 신장? 흘러갔던 벨져의 음성을 기억하며 릭은 다급한 손으로 몸을 만졌다. 아까 멀쩡히 쳐다보았던 눈을 만지고 배를 샅샅이 뒤졌다. 옆구리에도 훤히 보이는 한 가운데에서도 아무런 자국이 없었다. 배가 아닌가? 손을 뻗어 등을 확인해도 마찬가지였다. 불안한 마음에 팔과 다리를 살펴보던 릭은 벨져가 내는 소리에 행동을 멈췄다. 참지 않고 욕실이 떠나가라 웃고 있는 벨져에 릭은 곧 어이가 없어졌다.
“대체 그대는 무엇이 그리도 즐겁소? 사람을 이런 꼴로 만들어놓고.”
릭은 더 이상 겁이 나지 않았다. 뇌까지 얼려버릴 만큼 추운 한기때문이기도 했고 이미 갈 때까지 가버린 상황 때문에 더 이상 잃을 게 없다 생각했다. 벨져는 릭의 말에도 웃음을 걷지 않고 한참을 있다 여전히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약쟁이 장기 같은 건 필요 없어. 그런 걸 팔았다가는 그날로 장사 접기 십상이지.”
“그럼 왜 이러는 것이오? 나한테 얻을 게 없다는 걸 이미 알잖아.”
제 몸이 무사하다는 것을 깨닫고 릭은 안도함과 동시에 벨져에 대한 분노가 들이밀었다. 이런 장난이라니. 사람을 가지고 노는 데도 정도가 있지. 릭은 매서운 눈을 하고 벨져를 째려보았다. 나 화났소 광고를 하는 릭에 벨져는 안타까운 표정을 했다. 저가 마피아임을 잊은 모양이었다. 바보 같기는. 벨져가 짧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넌 니가 재밌는 인간이라는 걸 모르는 것 같네.”
벨져의 말에 릭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삶이 지루해지려는 참이라 재미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는데 그걸 찾았거든, 방금.”
릭은 손가락으로 저를 가리키며 물었다. 나 말이오? 벨져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리고는 무언가 잊은 것이 있다는 듯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선택지 같은 거 없어.”
가볍게 웃는 벨져에 릭은 머리로 뜻을 이해하려 했다. 벨져의 말을 곱씹고 릭은 큰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요는, 앞으로 저 남자가 질릴 때까지 그 옆에 있어야한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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