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월 14일 무비데이 때 풀었던 썰로
릭은 깨끗이 비운 접시를 보고 숨을 크게 들이쉬며 배를 두드렸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벨져는 옆에 두었던 냅킨으로 입가를 정리하고 있었다. 이렇게 마주하는 식사가 얼마만인지. 릭은 까마득히 멀게 느껴지는 마지막 식사를 떠올리다 그만두었다. 릭은 소스가 잔뜩 묻어 지저분해진 접시를 싱크대에 옮겼다. 식기가 저들끼리 부딪히는 소리들이 시원한 물소리에 씻겼다. 벨져는 제가 먹었던 그릇을 릭에게 전해주며 잘 먹었다는 인사를 남겼다. 그 뒤에 습관처럼 음식이 어떻다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난 번 오늘과 같이 릭이 직접 만든 요리를 먹고 네가 한 것치고는 먹을 만하다는 말을 했다 소소하게 다퉜을 때를 떠올린 탓이었다. 쏟아지는 물소리를 뒤로 한 채 벨져는 몸을 일으켜 거실로 향했다. 쇼파에 기대앉아 릭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제 앞에 놓인 리모콘을 쥐어들고 자잘히 나있는 버튼들을 살펴보았다. 길다란 막대 위의 많은 버튼을 일일이 눌러보고 무엇이 나오는지 확인하던 벨져의 옆에 어느새 설거지를 마친 릭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보고 싶은 것이라도 있소? 릭의 말에 벨져는 대꾸도 없이 그저 버튼만 누를 뿐이었다. 영화 카테고리에 들어가 화면을 내리는 벨져에 릭은 조용히 바뀌는 화면을 지켜보다 빨간 동그라미가 넘실대는 부분에서 벨져의 손을 붙들었다. 리모콘을 쥔 손이 겹쳐진 채로 릭의 의지대로 눌러지는 것에 일단 벨져는 잠자코 지켜보기로 했다.
나열된 영화들이 드러내는 은근히 노골적인 제목들과 포스터들을 훑으며 천천히 내렸다. 벨져는 감흥이 없는 듯 건조한 눈으로 릭이 움직이는 화면을 따라갈 뿐이었다. 릭은 문득 장난기가 일었다. 벨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궁금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제 손길이 닿지 않고도 귀를 붉히는 벨져가 보고 싶었다.
일부러 선정적인 포스터들만 골라 어떻냐고 묻는 릭에 벨져는 헛웃음을 쳤다. 웃음을 참으려 꾹 누르고 있음에도 새어나오는 릭의 입매에 그 의도가 뻔히 보였지만 딱히 꼬집진 않았다. 저렇게 기대하고 있는데 놀아줄까하는 마음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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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시작은 무난했다. 두 연인이 만나고 서로 사랑의 감정을 피우는 장면들을 보여주다 중반부에 들어서 묘하게 흐르는 분위기와 끈적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에 릭은 숨을 졸였다. 빠르고 급하게 움직이는 화면이 그들의 심정을 대신해주고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농도가 짙어지고 날카롭게 시작해 둥글게 끝나는 소리들이 울렸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소리가 공간을 채워 여기저기서 들리는 듯 했다. 갑자기 오르는 열에 릭은 옆에 앉은 벨져를 살피며 옷자락을 펄럭였다. 벨져는 여전히 감흥이 없는 얼굴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가. 애초에 특별한 반응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 이쪽이 확실히 벨져답긴 했다.
흥분한 배우의 표정이 잡히고 쾌락을 젖은 예쁜 얼굴을 보고 바로 옆에 가까이에 보이는 벨져가 저와 사랑을 나눌 때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상상했다. 눈썹을 늘어뜨리고 풀어진 눈을 감았다 살짝 뜨기도 하고, 예쁜 신음소리를 내기 바쁜 입이 말라 침을 삼키는 것마저도 색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예쁜 목소리가 평소엔 들려주지 않을 소리를 그리는 것을 떠올리기만 해도 아래로 피가 몰리는 듯 했다.
“릭.”
느닷없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놀라 릭은 몸을 움츠렸다. 왜, 왜 그러오? 바보같이 말도 더듬었다. 제가 생각하던 게 벨져에게 들켰을 리도 없는데 혼자 마음에 걸려 되려 티를 내고 있었다.
“영화보자고 한 건 네 쪽 아니었나? 집중해.”
조용히 읊조리는 벨져에 릭은 조금 풀이 죽어 알겠다 말하고 다시 시선을 화면으로 옮겼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서는 다른 생각들이 떠다녔다. 영화가 목적이었겠어. 오랜만의 데이트에 저런 영화를 굳이 같이 보자고 한 이유가 뭐였겠냐고. 말도 않고 혼자 속으로 툴툴대는 것이 다분히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본인은 자각이 없었지만.
제가 한 말 이후로 눈에 띄게 쳐진 릭은 꼭 귀가 늘어진 강아지 같았다. 입술도 좀 나온 것 같고. 벨져는 눈을 살짝 감고 한숨을 쉬었다. 내가 애랑 연애하지, 지금. 벨져는 눈앞에 널브러져있는 리모콘을 잡고 전원을 꺼버렸다. 느닷없이 까맣게 변한 화면에 릭이 눈을 끔뻑이다 고개를 돌렸다. 제 옆에 바짝 붙어 저를 바라보는 벨져에 이름을 부르려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얼굴에 릭은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했다. 내빼는 목을 벨져가 끌어당겨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당황하는 것도 잠시 릭은 손을 뻗어 벨져의 등을 안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점막을 훑고 휘젓다 떼어지는 입술이 촉촉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아까 보던 영화가 떠올라 릭은 눈을 살짝 찡그렸다. 다시 열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벨져는 릭의 몸 위로 올랐다. 내려보는 얼굴이 무표정하고 살짝 숙여진 고개가 머리카락에 그늘진 것마저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난 보는 건 흥미 없어. 기대했을 텐데 미안하군.”
말을 마친 벨져는 전혀 미안해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웃었다. 릭은 제 생각을 들킨 것이 민망하다기보다는 허탈해 웃음을 지었다.
“굳이 따지자면 직접 하는 편이 좋아서 말이야.”
벨져는 말을 마저 이었다. 그러니까,
“안 벗고 뭐해?”
내리깐 눈이 얇게 휘는 것하며 말하는 입꼬리이 살짝 올라간 것에 릭은 다시 한 번 헛웃음을 지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벨져의 모습이 곧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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