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밀님이 보고싶다고 해서...
벨져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마저도 눈을 뜨는 감각이 없었다면 알지 못했을 것이었다. 저를 감싸는 것은 온통 새까만 어둠 뿐이었다. 벨져는 엎어져있던 몸을 일으켜 제가 처한 상황을 인지했다. 어떤 빛도 새어들지 못하는 곳이었다. 눈을 깜빡여도 피부가 맞닿고 떼어지는 그 감각만이 느껴지는. 벨져는 제 기억의 마지막을 되짚었다. 안타리우스와 전투 중이었다. 릭과 함께였고 등 뒤에 있던 릭이 내는 둔탁한 비명에 벨져가 확인하려 곁눈질한 사이 기습을 받았다. 그대로 쓰러져 찬 바닥에 얼굴을 부볐다. 희미한 눈꺼풀 사이로 저보다 먼저 쓰러져있는 릭이 담기고 그리고 그 후엔? 아무것도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고 이어지는 것은 바로 지금의 컴컴함이었으니까. 혹시나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이 어둠 때문이 아니라 눈을 잃었기 때문은 아닌지 제가 정말 살아있는 것은 맞는지 생각들이 뒤엉키고 있을 때 강렬한 빛이 쏟아졌다. 어둠에 익숙한 눈이 번쩍이는 빛에 찔려 눈을 웅크렸다. 멍한 눈을 몇 번 깜빡이다 그제야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제가 있는 곳은 한 면을 제외한 나머지 세 벽이 거울로 둘러싸인 방이었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은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손이며 다리며 감각들도 특별히 이상한 곳은 없었다. 벨져는 제 앞에 엎어져있는 릭을 흔들었다. 일어나라. 벨져의 거센 손길에 릭은 짧게 숨을 들이키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곳이 어디오?”
“…아마 안타리우스의 본거지겠지. 이런 식으로 올 줄이야. 생각도 못했군.”
벨져는 제가 입고 있는 검은 가운을 들춰보며 말했다. 끝이 씁쓸한 벨져의 말에 릭은 대답이 없었다. 릭 또한 벨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릭도 자신의 몸을 살피었다. 벨져가 했듯이 제 몸을 샅샅이 만져보다 변한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긴장했던 것이 조금 풀어진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왜? 안타리우스가 여태 목적없이 움직였던 적이 있던가? 안도하던 생각이 불안으로 바뀐 것은 찰나였다. 그래서 결국 이곳에 가둔 목적이 무엇이지. 아마 안타리우스의 신도들이 저들을 감시하고 있을 테고 그들은 모여앉아 저희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 보지 않아도 뻔했다. 앞으로 무언가가 벌어질 것이었다.
방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부술 기세로 밀고 당겨도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문을 두드리던 벨져의 손이 미끄러지고 그곳에 주저앉았다. 벨져는 자신의 무력함에 손을 그러쥐었다. 릭의 능력도 이곳에선 통하지 않는 듯했다. 몇 번이고 손을 움직여 게이트를 만들어보려 했으나 모든 시도는 실패에 그쳤다. 릭은 허망한 눈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분함에 몇 번이고 욕지기를 뱉으며 바닥을 내려치다 결국 손이 벌겋게 부어오르고 나서야 그만두었다. 어떻게 해야… 어떻게 하면… 소용없는 중얼거림만 쌓일 뿐이었다.
맞닿아 있는 거울 속에 수많은 거울들이 늘어져있었다. 그 속에서 릭과 벨져가 찬찬히 갇혀있었다. 희망을 잃은 자의 형상을 하고. 벨져는 문득 헛웃음을 들이켰다. 익숙지 않은 저의 모습이었다.
순간 방안에 쇠붙이 소리들이 울렸다. 소리가 저들끼리 부딪혀 지직거리는 소음을 내더니 중간에 말소리 같은 것들이 섞여들었다. 단어로 파편이 나뉘어있어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벨져가 그들을 향해 무언가 외치려던 때에,
“……시작해.”
그것으로 소음들은 끝이었다. 칼로 자른 듯이 그 후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명히 들리는 소리에 일순 당황했다. 외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설핏 느꼈던 두려움이 어느새 성큼 다가와 있었다. 먼저 반응한 것은 릭이었다. 이 방안을 보고 듣고 있을 저들에게 무슨 짓이냐며 내보내달라는 말들을 잔뜩 쏘아냈다. 아무리 그런 말들을 내놓아도 들어줄 리가 만무하건만 이미 그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패닉에 빠진 릭이 벽을 두드리고 아무리 고함을 쳐도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릭, 그만해. 소용없는 짓이다. 벨져는 겉으로는 평온을 유지하는 듯 했으나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라고 멀쩡할 리는 없었다. 벨져의 말에 릭이 대꾸했다. 그럼 나는 어찌 해야 하오. 텅 빈 눈이 저를 바라보는 것에 벨져는 숨이 막혔다.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져야해. 릭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릭의 저런 눈은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실망과 절망이 녹아든 눈을 피하고 싶었다. 릭이 입술을 열고 벨져는 릭이 곧 말할 소리를 기다렸다. 조용한 공간에 유독 제 심장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러다 벨져는 느리게 뛰던 심장이 서서히 속도가 빨라지는 것에 눈썹을 찌푸렸다.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때에 귓불까지 끼치는 열을 느꼈다. 방 안의 공기가 변한 것인지 단순한 착각인지 구별할 수 없었으나 닿는 피부에서도 느껴지는 진동에 벨져는 확신했다. 단순한 착각은 아니었다. 벨져는 거울 속에 제 모습을 확인했다. 열로 벌겋게 달아올라있는 제 모습이 낯설었다. 벨져는 고개를 돌려 릭을 마주했다. 벨져 저 혼자 느끼는 변화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제가 아까 보았던 제 모습과 거의 비슷한 모습이었다. 릭의 허망했던 얼굴에는 다시 당혹감이 서렸다. 말을 하려던 입은 어떤 것도 내뱉지 못했다. 이것은 분명, 아까 들었던 ‘시작’이었다.
벨져는 자꾸만 끼치는 열에 입고 있던 얇은 천마저도 신경이 쓰였다. 어쩐지 작은 움직임에도 제 몸을 스치는 것이 자꾸 눈을 얇게 했다. 특히 앞부분에서는 더욱. 그럼에도 옷을 벗어던지지 않았던 것은 저를 보고 있는 눈들 때문이었다. 릭도 그랬지만 안타리우스의 신도들 탓이 컸다. 벨져는 옷을 펄럭여 만든 바람으로 조금이나마 열을 식혔다. 새삼스레 다시 제가 처한 상황이 실감이 났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무언가의 징후는 빠르게 나타났다. 계속해서 빠르게 뛰는 심장에 벨져는 점점 숨을 고르기가 힘들어졌다. 숨을 숨기려다보니 자꾸 몸이 조금씩 비틀렸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복잡한 머리로 끊임없이 흐르던 생각이 새로이 나타난 몸의 변화에 명확해졌다. 거치적거리던 아래가 빳빳이 몸을 세우고 있었다. 몰리는 열에 아랫배가 무거웠다. 릭은 손을 그러쥐고 숨을 내쉬었다. 쓰레기 같은 놈들. 저들이 바라는 것은 저와 릭의 합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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