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까스님 릭벨 페티쉬 합작에 제복페티쉬로 참여한 글
오늘따라 사람이 많네. 커피잔에 떠있는 빨대를 입으로 가져다대며 하는 생각이었다. 릭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생각해보니 추수감사절이 곧이었다.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커피를 마셨다. 잔뜩 시끄러운 소리를 낸 빨대에서는 밍밍한 맛뿐이었다. 릭은 그게 꼭 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유달리 나쁘지도 유달리 좋지도 않은 평범한 인생. 큰 굴곡 겪는 것보단 평탄히 사는 것이 좋다고들 말하지만 릭의 생각은 달랐다. 평탄하게 굴러 재미없는 삶이 행복한 삶인가? 특히 요즘이 더 그러했다. 어렸을 땐 희미한 기대라도 있었지.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은 미적지근한 하루하루에 오늘이 며칠인지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릭은 조금 늦게 세상의 진리를 깨달았다. 포기하면 편하다. 얼핏 느끼고 있던 진실을 받아들이고는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요즘이었다.
릭은 마시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녹은 얼음이 저들끼리 부딪혀 달그락거렸다. 릭은 유리창 너머를 쳐다보던 시선을 당겼다. 깨끗하게 비친 제 모습을 보며 턱을 괴었던 손가락을 천천히 까딱거렸다. 구불한 갈색 머리카락부터 책상에 올려놓은 손까지 찬찬히 훑고는 한숨을 쉬었다. 눈을 돌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시던 커피가 쓰레기통 바닥을 뒹굴고 종업원의 인사소리가 뒤를 이었다. 문에 달린 종이 경쾌하게 울리고 동시에 선선한 바람이 저를 덮었다. 릭은 코트자락을 정리했다. 손목에 걸었던 쇼핑백을 쥐고 걸음을 옮기려 고개를 들고, 사람들 속으로 시선을 던졌을 때, 릭은 눈을 깜빡였다. 잘못 본 것은 아닌가 한 번, 두 번. 그리고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떼지 못했다. 걸어오는 사람들을 배경삼아 저 혼자만 빛나는 것이 있었다. 주변을 채우던 소음이 거짓말처럼 사그라들고 호흡하는 것을 잠시 잊게 되는 그런 건 영화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했었지. 릭은 멈춘 숨을 급하게 토하고 나서야 제가 잠시 숨을 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렸을 때 보았던 영화가 있었다. 전쟁 중의 상황을 다룬 액션영화였는데 액션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친구들 손에 붙들려 반강제로 보게 된 것이었다. 의자에 기대 팝콘만 열심히 집어먹던 릭은 한 남자의 등장에 쥐었던 손을 멈추었다. 이상한 감정이었다. 가슴께가 간질거리고 일렁이는. 쥐고 있던 팝콘을 떨어트린 것도 같았다. 의미모를 감정은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계속됐다. 친구들 역시 그의 이야기를 했으나 릭이 느끼는 감정은 ‘멋있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조금 더……. 답답한 마음에 집에 돌아와 그에 대한 사진들을 찾았다. 아까 느꼈던 감정은 그 영화에서처럼 제복을 입은 사진뿐, 다른 사진에는 별 흥미가 없었다.
단순히 영화에서 맡은 캐릭터가 매력적이었을 뿐이라고 빠르게 단정 짓던 릭의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날에 우연히 본 군인들의 행진에서 저번과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이 이상했다. 생각을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은 자신은 제복을 입은 사람에게 끌린다는 것이었다. 이런 쪽에 관심이 생길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막상 인정하고 나서는 마음이 편해졌다. 좀 이상한가 싶기도 했지만 뭐 어떤가. 제각기 다른 취향을 가지고 제겐 그것이 제복일 뿐이었다.
빠른 인정 후에 릭은 본격적으로 제가 좋아하는 것을 좇았다. 자료를 찾고 사진을 보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이상한가하는 의구심조차 잊을 때쯤, 릭은 의외의 대상에게 들키고 말았다. 몇 번째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 자신의 전 여자친구에게. 잠시 빌려준 노트북에서 그걸 발견할 줄은 몰랐지. 노트북 화면을 꽉 채운 수많은 제복 사진들에 이게 뭐냐며 묻는 표정 속에서 비치는 묘한 경멸을 봤다. 으레 있는 야한 사진이나 동영상 대신 온통 제복 사진들이 늘어져 있으니 그런 표정을 짓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 생각했지만 여지껏 릭은 제게 그런 표정을 짓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눈빛을 받을 짓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이상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옛날에 했던 과제 때문에 찾을 것들이라고 급히 둘러대 상황을 모면하긴 했지만 이미 받은 충격은 어쩔 수가 없었다. 릭은 그때 현실로 돌아왔다. 제가 좋아했던 것들이 다른 사람에겐 어떻게 비춰지는지, 그것을 깨달은 그들이 저를 어떻게 바라볼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가 돌아간 후에 모든 것을 다 지웠다. 몇 년을 모았던 자료들을. 아깝지 않았냐 물으면 그런 감정이 들 틈이 없었다고 하겠다. 그 후로 완벽하게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반칙이야.”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술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말이었다. 저는 그것에 대해 모든 것을 지웠고 정리했다, 고 굳게 믿고 있었다. 다신 그런 일이 없겠지 생각했는데. 말 그대로 반칙이었다. 완벽하잖아. 일직선으로 떨어지는 넓은 어깨, 적당히 두꺼운 허리, 긴 다리, 올곧은 자세까지. 그 위에 걸쳐진 군복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아예 이것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닐까싶을 정도로. 제게 걸어오는 장면이 느리게 느껴졌다. 남자는 걸어오는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릭은 본능처럼 알 수 있었다. 제 생에 이보다 더 완벽한 제복은 다신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릭이 감상에 젖어있는 동안 그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몸이 굳어 어쩌지도 못하는 릭은 제가 움직이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불행히도 몸은 말을 듣지 못했다. 각도가 정확한 팔이 제 옆을 스치고 살짝 남는 소매 끝이 닿는 것에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뭐라도 해야. 지금 놓치면 다음은 없었다. 시끄럽게 뛰는 심장소리가 머리 전체에 울리는 느낌이었다.
옆을 지나던 남자가 걸음을 멈춰 섰다. 그와 동시에 릭의 심장도 저 아래로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었다. 릭은 당황스러움에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왜? 혹시 그도 제가 마음에 들어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제대로 정돈할 시간이 없을 만큼 혼란스러웠다. 고개를 돌려 저를 쳐다보는 시선에 릭은 열이 올라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다 보일 것이었다. 창피함에 얼른 가주었으면 하는 생각까지 들 지경이었다. 물론 진심은 아니지만.
시야 한 구석을 차지하는 군복이 어른거렸다. 아래로 힘이 들어가는 것에 한숨을 내쉬었다. 릭은 자꾸만 열이 몰리는 중심에 속으로 제가 알고 있는 신을 모조리 찾았다. 여기서는 아니라고, 안된다고 신경쓰지 않으려 해도 자꾸 눈이 그것을 좇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본능을 억제하기엔 유혹이 너무 가까웠다.
“너.”
릭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는 내쉬는 숨이 자연스럽지가 못했다. 듣기 좋은 나긋한 목소리가 가까이서 울렸다. 숨을 내쉬는 것도 고개를 돌리는 것도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제 목에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나는 건 아닐까. 대답도 하지 못하고 겨우 고개만 돌리는 릭을 보는 눈빛은 고압적이었다. 분명 눈높이는 비슷한 것 같았는데 그 눈빛에 더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이런 생각을 할 때쯤 남자가 말을 이었다.
“이것 좀 놓지 그래.”
릭은 눈썹을 찡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못 들었나? 제가 무얼 잡고 있다는 소리 같은데. 소매가 스쳐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이 다였는데 그런 제가 잡긴 무얼 잡는단 말인가. 남자는 눈을 아래로 내렸다 다시 릭을 쳐다보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에 대한 답이었다. 남자의 말에 따라 쳐다본 손은 그의 소매 끝을 잡고 있었다. 얼마나 세게 쥐고 있는지 손끝이 하얗게 변한 채였다. 어이없음에 실소가 터졌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원망만 늘어놓았는데 저도 모르게 제 절실한 바람을 들어준 것이었다. 물론 릭은 생각하지 못한 방법이었지만.
남자는 그대로 릭을 쳐다보았다. 내려보는 눈은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 밑으로 이어지는 탄탄한 몸을 싸고 있는 군복. 릭은 자꾸 날아가려는 정신을 붙잡았다. 남자가 입고 있는 군복을 만지고 싶어 움찔거리는 손을 달래야했다. 바로 제 눈앞에 놓인 완벽한 욕망에 중심은 점점 팽팽해지고 있었다. 머리까지 도는 열기에 시야가 아른거리는 듯 했다. 이봐. 남자가 저를 한 번 더 불렀다. 가슴께에 붙은 명찰에 적힌 이름을 속으로 읊었다. 벨져 홀든. 이름까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릭은 이미 이성이 반쯤 날아간 체였다.
릭은 제 성정체성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다. 생각할 여지가 없다고 해야겠지. 우선 사람보다 제복을 더 좋아했고 연애는 그때그때 좋은 사람과 했다. 그 상대가 남자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성별 따위 아무렴 어떤가.
한 번 더 릭을 부르려던 벨져는 갑자기 고개를 들고 저를 똑바로 쳐다보는 릭에 열었던 입을 다물었다. 비장한 결심이라도 한 듯한 눈빛이 매서웠다. 거리 한복판에서 힘을 써야 하는 일이 있지는 않겠지 생각했지만 오른손은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대 혹시,”
나오는 목소리가 무거웠다. 아는 사람인가? 제 기억을 샅샅이 훑어도 영 감이 오질 않았다. 애초에 제가 얼굴을 익힐 만큼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적긴 했지만. 릭은 숨을 고르고 침을 삼켰다. 벨져는 차분히 릭의 말을 기다렸다.
“남자… 좋아하오?”
그 말에는 긴 메아리가 치는 듯 했다. 말끝이 귀를 맴돌고 벨져는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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