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che : 틈새
“진짜 이 방법밖엔 없는 건가?”
벨져의 말에 릭은 순간적으로 숨을 들이켜 시선을 피했다. 벨져가 저를 탓하려 꺼낸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제 발이 저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잠입을 하는 임무였고 좌표가 삐끗했던 탓에 도착한 곳은 작은 방이었다. 목표한 곳과는 꽤 멀리 떨어진 방이었고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사람이 없는 게 다행이지. 한숨 돌릴 겨를도 없이 저를 쳐다보는 것으로 말을 대신하는 벨져에 릭은 다시 한 번 게이트를 열려고 했으나, 문 밖으로 들려오는 소리들에 놀라 옷장 안으로 숨어있는 채였다.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면 임무는 실패로 돌아갈 것이 뻔했으니.
몸을 구기니 성인남자 두 명이 마주보고 앉아있을 공간이 된다는 것이 신기했다.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무리가 온다는 것을 생각하면 신기해할 것도 아니었지만.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들은 어째 줄어들 생각을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리가 줄어 게이트를 열까 하는 순간에 맞춰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나갈만한 창문은 없고 옷장 밖으로 나가자니 누가 들어올 것 같고. 이럴 때에 간절히 필요한 것이 제 능력이었으나 소리 때문에 쓰질 못한다니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방은 깜깜했고 옷장 속도 마찬가지였다. 작은 틈들이 사이사이에 나있긴 했으나 소용은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덕분에 숨 쉬는데 불편함은 없다는 것 정도. 몸을 이리저리 트는 주기가 잦아지고 있었다. 특히 벨져는 더 그랬다. 몸을 쓰는 사람을 좁은 공간에 가둬두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는 직접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벨져가 이따금 몸을 틀 때마다 조금씩 구겨지는 미간이 보일 정도로. 릭은 제 바로 뒤에 있는 옷장 벽에 머리를 가볍게 부딪히곤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 거창하지도 않은 임무였는데 제 실수로 일을 망쳐버렸다. 한 번 더 확인을 했어야 했는데. 과거를 탓해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자꾸 후회가 되는 것 또한 어쩔 수는 없었다.
벨져는 말이 없었다. 책망을 직접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다행이었으나 그의 행동이 릭을 불편하게 했다. 모든 게 제가 만든 상황이었기 때문이겠지만.
“그러고 보니,”
아주 작은 소리였다. 벨져의 눈은 릭을 보고 있지 않아서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이렇게 옷장에 숨어있었던 적이 있었다. 어릴 때였는데……,”
제 어린 시절을 얘기하는 모습이 남의 얘기를 하는 양 담담해서 릭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그것마저 그다워서. 시선은 허공에 고정한 채 기억을 더듬을 때 가끔 눈동자를 굴리는 것이 귀엽기까지 했다. 그 벨져 홀든이. 저보다 더 어른스러워 보이는 7살 어린 제 파트너가. 릭은 결국 웃는 것을 들켰고 어김없이 벨져가 물었다. 왜 웃나?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얘기 계속 하시오. 제 대답에 금방 다시 얘기를 시작하는 게 아, 정말. 릭은 웃음을 들키지 않으려 작게 헛기침을 했다. 한 번 더 들켰다간 다시 예의 침묵으로 돌아올 것 같아서. 저 스스로 옛이야기를 꺼내다니 신뢰받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릭 좋을 대로 하는 생각이지만. 뭐, 어떤가.
릭은 벨져가 하는 이야기보다는 벨져의 행동에 더 집중했다. 이유를 굳이 말한다면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서.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의, 좁은 옷장에 벨져와 둘이 갇혀 있는 상황이 흔한 상황은 아니지 않은가.
벨져는 어려운 사람이었다. 근 7개월 가까이 임무를 함께 해결하고 그 과정에서 수없이 만났음에도 그랬다. 친해지려 농이라도 건네면 싸늘한 눈빛을 받기 일쑤였다. 임무를 위한 관계였고 그 외의 것들이 필요하냐면 굳이 그렇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기왕 오래봐야 할 관계라면 불편한 것보다는 편한 것이 나았다. 귀족 도련님과는 어떻게 친해져야 하는가 항상 생각만 할 뿐, 실행에 옮기지는 못한 날들이 수두룩했다. 임무 중에는 어떠한 외적인 얘기도 듣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본인이 먼저 입을 열다니, 릭으로선 놀랄 수밖에.
벨져가 눈을 온전히 뜨고 저를 쳐다볼 때면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빛이 들어올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 신기했다. 릭은 아예 턱을 괴고 벨져를 관찰했다. 벨져는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작게 말들을 뱉어내는 입술에서 시선을 올렸다. 느릿하게 뜨고 감는 눈, 가끔씩 미세하게 움직이는 눈썹. 그리고 새삼 감탄하게 된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생긴 건지. 시기가 나거나 부럽다거나 그런 수준을 넘어서 단순한 감탄만 내게 된다. 어느 한 군데 모난 구석 없이 깔끔하게 선이 맺힌 게 그림이라도 저렇게 그리긴 어렵겠다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 릭은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찰나였다. 눈이 둥글게 휘고 마냥 아무 것도 비치지 않을 것 같은 얼굴에 웃음이 번지는 것이 느리게 보였다. 눈이 크게 뜨이고 한 번 더 보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사라지고 난 후였다.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는데. 릭은 아까의 표정을 다시 떠올렸다. 딱딱한 선들이 이어진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그 선들이 휘어져 나는 느낌이 판이하게 달랐다. 되뇌일수록 옅어지는 모습에 릭은 인상을 썼다. 한 번만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왜인지 이유는 모르지만.
릭은 희미하게 들리는 자신의 이름에 고개를 들었다. 불러도 못들을 만큼 딴 생각을 하다니, 팔자 좋군.
“게이트를 열어, 릭. 소음이 멎었다.”
-
벨져의 거처로 공간을 연결해 잘 가라는 인사를 받고 집에 돌아오기까지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몸을 기댈 때까지도 정신이 멍했다. 어떻게 게이트를 열고 어떻게 집에 왔는지. 갑자기 모든 것이 꿈결처럼 모호하게 느껴졌다.
사실 아까 잘못 봤던 게 아닐까. 옷장 속은 어두웠고, 그리고 제가 봤던 것은 너무 빠르게 사라졌고. 릭은 제가 원하던 것을 환영으로 본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제가 원하던? 그런 걸 원했던 적이 있었나. 벨져가 웃는 얼굴을. 웃으면 어떨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벨져가 짓는 표정이라곤 무심하거나 가끔 미간을 찌푸리는 게 다였으니까. 저 얼굴로 웃으면 어떨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던 것도 같았다. 그리고, 순간, 그토록 떠올리려 해도 떠오르지 않던 벨져의 얼굴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분명 빛 하나 없었던 곳이 일순 환했다 착각할 정도로 해사한 얼굴이. 제가 상상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릭은 생각을 멈췄다. 평소보다 더 잦게 뛰는 심장에서 잔잔하게 무언가 퍼지는 느낌이었다. 간지러워지는 손가락 끝을 움켜쥐었다. 아무래도 피곤한 모양이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그 좁고 어두운 곳에 저 하나도 아닌 둘이서 갇혀있었으니. 릭은 피어오르는 감정을 애써 무시하며 욕실로 향했다. 씻고 나면 나아지리라. 릭은 상기된 볼을 만지며 생각했다. 오늘은 정말 이상한 날이었다. 그리고 릭은 어쩐지 그날 밤 잠을 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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